2018/2018_생활2018.04.24 11:39


최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담 섞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경제학을 잘 모르거나 잘 알아도 밥그릇을 지키고 싶은 법조인에게 전관예우와 관련한 실증 분석에 대해 설명/설득하는 것과, 강력한 이념으로 무장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에게 남성 역시 성차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설득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어려울까요?"


나는 후자가 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념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마치 종교 광신도와 같아서, 답을 미리 정하고 자신의 논리를 그 답에 끼워맞춘다는 꺼림칙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객관성을 지향해야 하는 경제학도라면 자신의 이념을 최대한 배제해야 옳다. 데이터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사실이 데이터의 왜곡된 해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 가설에는 이념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가설의 바탕이 되는 통계의 해석은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82년생 김지영"과 "79년생 정대현"이 평일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통계청 데이터를 정리해보았다. 30대 상용직 임금근로자로 표본을 한정했다.


  


데이터 자체만 보면 누구나 아쉬운 말을 할 수 있다. 정대현은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느라 힘들고, 김지영은 회사에서 빨리 돌아와 육아와 청소를 하느라 힘들다. 일터에서 야근하고 집에서 바로 쓰러지는 정대현과 일터에서 집중하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김지영. 둘이 서로 보듬어도 모자랄 텐데 둘이 왜 그렇게 싸우는지,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결국 역지사지가 중요하다고 할 것이지만, 말은 쉽다. 선천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자신의 고됨 앞에서 상대의 고됨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래도 조금만 서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면 지금처럼 심하게 싸우지는 않을 것 같은데.



------


18.04.24. 추가.


위의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여러 좋은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아래에 정리해서 남긴다.


이 그래프 및 Casey Mulligan 교수의 그래프가 던져주는 시사점은, 남성이 장시간 일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시간(새벽)에 더 많이 일한다는 것이고, 이 점이 소위 남녀임금 차이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겁니다. 차이만 나타나면 그것을 무턱대고 차별이라고 외치는 행태에 제동을 거는 또다른 측면이라고 봅니다.


애시당초 경제적 삶의 질이란 "가구 소득/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개인 소득/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가 노동자 효과(Added Worker Effect)"라고 노동경제학에서 부르는 것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남편이 직장에서 벌어오는 돈의 현재 추이와 미래 예측 추이에 따라 여성이 노동공급을 결정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개인 소득"이 정말로 경제적 삶의 질을 결정한다면 이런 실증적 패턴을 설명할 수가 없지요.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측면에서 보면 가구 전체 노동시간이 아니라 개인의 노동시간과 노동시간 타이밍이 해당 개인의 삶의 질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죠.


부가 노동자 효과(AWE)는 결혼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하고 몇십 년 지난 상태에서도 남편이 실직하거나 혹은 실직 가능성이 커 보이면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개념이죠. 그러한 미시적 행동의 거시적 결과는 여성은 경제활동 참가율이 경기변동 사이클에 대해서 그다지 동행적(procyclical)이지 않다는 것이고 이것이 Mankart and Oikonoumou (2017) 논문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외조, 여자는 내조"라는 전통적 규범(traditional norm)이 사실은 여성의 선택에서 비롯되었고 해석하시는 것인가요?) 이것이 선택이냐 강제냐라는 논의는 선택과 강제라는 단어 자체가 수리과학적으로 통일된 정의가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가 지난해지지만, 저는 이것을 성별 분업으로 해석하는 Gary Becker의 주장이 제일 설득력이 강하다고 봅니다. 이것을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제라고 부른다면 Adam Smith가 말하는 분업도 강제적 분업일텐데 이것은 강제성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남성이 새벽이나 늦은 밤에 더 많이 일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이 자료는, 이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느냐 강제라고 부르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불리한 분업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죠.


(남녀임금 차이를 설명하는 노동경제학 논문들은 언제쯤 소진이 될까요?) 극히 최근까지도 전혀 새로운 논문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 계속될 주제일 것 같습니다. 심지어 최근 나온 논문 중에는 남자들은 친구가 많은데 그 친구들이 서로 친구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여성들은 친구는 적은데 그 친구들끼리 서로 친구일 가능성이 높은 소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이 점을 토대로 불확실성이 높은 직군에서 남녀임금 차이가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한 논문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채널인데 이러한 논문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 할 것이 많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가슴2018.04.22 02:12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크게 살고 싶은지 작게 살고 싶은지, 시끄럽게 살고 싶은지 조용하게 살고 싶은지, 바쁘게 살고 싶은지 여유롭게 살고 싶은지, 혼자 살고 싶은지 함께 살고 싶은지, 아무 것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냥 내 기분에 맞춰 나만의 동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다는 편이 정확해 보인다.

잘하면서 또 좋아하는 것이 업이 되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만 그러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좋아하는 것도 업이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변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잘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좋아하는 것을 취미로 두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굳건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연구는 취미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떤 사람에게도 존경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으로부터 본받고 싶은 부분은 여전히 찾을 수 있다. 우리 회사에는 여러 측면에서 훌륭한 분들이 많고, 학구열이 넘치기로는 윤 대사님이 단연 돋보인다. 현업 중에도 논문을 쓰시는 것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선한 자극이다.

본업에 충실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래도 봐줄 만한 논문을 종종 써내는, 그러한 경제관료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능력과 노력에 비추어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2018 > 2018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춘기.  (0) 2018.04.22
위선에 대하여.  (0) 2018.03.26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0) 2018.02.25
위로 받고 싶을 때.  (0) 2018.02.23
반성.  (0) 2018.02.03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4.18 07:18


정치학자들의 연구도 경제학자들의 연구와 접점이 많다. 로체스터 출신 정치학자들은 수학 모형을 이용하여 정치 현상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은 이론 미시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James M. Snyder Jr.가 건재한 하버드 출신의 정치학자들은 수리 모델보다는 실증 분석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 정치 현상을 계량적으로 분석하는데, 나의 흥미와 많이 겹친다. 이와 관련하여 박정희 지지율과 신문/라디오 방송 간의 관계를 재미있게 분석한 논문을 하나 읽었다.


This study explores whether and how exposure to mass media affects regime support in competitive authoritarian regimes. Using geographical and temporal variation in newspaper circulation and radio signal strength in South Korea under Park Chung Hee's competitive authoritarian rule (1961–1972), we find that greater exposure to media was correlated with more opposition to the authoritarian incumbent, but only when the government's control of the media was weaker. When state control of the media was stronger, the correlation between media exposure and regime support disappeared. Through a content analysis of newspaper articles, we also demonstrate that the regime's tighter media control is indeed associated with pro-regime bias in news coverage. These findings from the South Korean case suggest that the liberalizing effect of mass media in competitive authoritarian regimes is conditional on the extent of government control over the media.


사실 경제학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예전에 Matthew Gentzkow에 대해서 을 남긴 적도 있다. 내가 자주 확인하는 메릴랜드의 Melissa Kearney 역시 비슷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Media Influence on Social Outcomes: The Impact of MTV's 16 and pregnant on Teen Childbearing"은 청소년 임신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TV 프로그램이 실제 10대 출산율을 줄였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경제학 최고 저널인 American Economic Review에 실렸다. 또한 미국의 "Sesame Street"는 우리나라의 "뽀뽀뽀"나 "하나둘셋"에 상응하는 TV 프로그램인데, American Economic Journal에 실리는 "Early Childhood Education by MOOC: Lessons from Sesame Street"는 이 채널을 본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향상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두 논문 모두 경제학에서 매우 저명한 저널에 수록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분석이라고 보인다.


중학교 졸업하는 해까지 우리집 TV는 채널이 딱 4개 나왔다. MBC, KBS1, KBS2, 그리고 EBS. 포켓몬스터가 나오는 SBS(충북은 CJB)를 그렇게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시 우리집 TV가 머리를 세게 내려쳐야만 잘 나왔던 마법의 Goldstar TV였기 때문에. 


TV가 바보상자라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아빠는 맨날 TV 전기코드를 뽑아서 숨겨두었다. 그런데 버리지는 않았다. 이 뜻은 자기가 보고 싶을 때는 나도 TV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말 저녁은 네 가족이 모여 같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었다. 첫사랑, 파랑새는 있다, 여우와 솜사탕, 이러한 것들이 생각난다.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4.14 06:41


연구자들 세계에 와서 이들을 최대한 흉내내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다. 여기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논문을 어느 저널에 내느냐"라는 큰 틀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다. 이 우산 속에 내재된 각종 세세한 룰을 엿볼 수 있는데, 내가 속한 세계의 룰과는 많이 다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옹호하는 편이다. 지금도 그러한 기질이 있어서, 연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가 실제로 이어져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감히 말하지만, 실제는 연구자의 몫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 그러고 싶다면 우리 세계 사람들을 영리하게 설득하거나 스스로가 우리 세계로 기민하게 넘어와야 한다.


직역마다 운영 원리가 다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에서는 새로운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여러 생각이 있겠지만, 우리 세계의 본질은 "타협"이라고 본다.


순전히 나만의 느낌이지만, 연구자들은 이 타협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연구자들은 최대한 자신이 옳다고 말해야 하는 룰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새로운 세계의 룰을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자신들의 룰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안 그러는데 너네는 왜 그러냐?"라는 말을 유독 많이 한다는 느낌이 있다.


타협이 기본인 우리 세계에 오고 싶은 연구자라면, 때로는 연구자로서의 소신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이중적이라는 비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세계에 오기 위한 최소한의 마음가짐이다. 그럴 용기와 배짱이 없으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편이 낫다. 나도 주관이 뚜렷한 편이지만 그것은 내 개인 사정일 뿐이다. 좋든 싫든, 우리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타협, 절충, 균형의 원리를 존중해야 한다.


사실 연구자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기반성을 할 줄 안다면 우리 세계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타협은 "나는 틀릴 수 있다."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연구를 얼마만큼 신뢰하는가? 내 연구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데 내 연구는 왜 좋은 저널에 실리지 않는가? 내 연구가 좋은 저널에 실리지 않았는데 내 소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설령 내 연구가 좋은 저널에 실렸다 할지라도 내 연구를 근거로 정책이 형성되었을 때 나는 결과에 책임을 질 자신이 있는가?


이들 질문을 곱씹으면 왠지 스스로가 작아지면서 타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나는 스스로를 연구자들 세계에 잠시 방문한 손님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내 능력이 닿는 한에서 이들의 룰을 배우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나의 악취미가 더해져서,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나는 내 분야의 우리나라 주요 경제학자들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 거의 다 안다.


그래서일까, 우리 세계에 관심이 많은 이쪽 세계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노력을 했으면 바람이 있다. 그러면 서로 조금 더 편안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8/2018_생활2018.04.01 07:36


봄방학에 서부를 가볍게 돌고 왔다. 자연으로 갈수록, 몸이 힘들수록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좋은 음식을 먹거나 가만히 쉬거나 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이제는 돈보다는 시간이 아쉬운 시점이 되었다. 되도록 많은 곳을 돌아다니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여기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고 대부분은 "헬조선" 탈출을 꿈꾼다고 하지만, 내 마음은 천천히 한국으로 떠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선택들, 가령 결혼이라든지 가족계획이라든지 커리어라든지 하는 것은, 한국에서의 고된 삶을 먼저 생각하면서 결정할 것이다.


부침이 있는 삶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 이는 전쟁 속에서 찾을 수 있지 평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지나친 밝음에 도취되었을 때 내리는 결정은 앞으로 겪어야 할 어두움의 깊이를 간과한다. 그리고, 나는 내 본성에 역하는 결정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다. 


왜 굳이 힘든 상황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은 솔직히 없다. 다만 나는 영화 "가타카"의 Ethan Hawke처럼, 투박하고 미련하고 구식적인 삶에 진한 향수를 느낀다. 특이한 향수이다.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존중 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지 못하면 오랫동안 함께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가슴2018.03.26 07:15


차별 주제를 연구할 만한 우리나라 데이터를 구하게 되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데이터를 만져보고 있다. 성별/직업별 근무시간 및 임금격차를 성차별 문제와 연결 짓는 시도를 해보려고 하는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사소하게나마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다. 참고 문헌도 다시 찾아 읽고 있다. (링크 1, 2)


관련 연구를 찾다 보니까 좌파에 가까운 경제학자들의 글도 많이 접하게 된다. 이상헌 박사님은 균형이 잘 잡힌 노동경제학자이다.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라는 책을 쓰셨는데, 딱딱한 보통의 경제학 서적과는 다르게 상당히 문학적인 감성으로 현실 경제 이야기를 잘 풀어쓴 책이다. 글을 참 따뜻하고 예쁘게 잘 쓰신다.


차별과 관련하여 자성의 목소리가 담긴 이 분의 을 하나 읽었다. 진솔함이 담긴 자기반성의 글은 그 솔직함이라는 매력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묘한 힘이 있다.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인간적인 말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차별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동물적인 행동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반감이 생긴다. 위선에 대한 적대감은 상당히 자연적인 반응이고, 나는 이 원초적인 감정에 잘 굴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 역시 위선의 덫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삶의 많은 부분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또한, 그렇게 위선적인 사람을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종종 실수를 저지르면서 이것에 터무니 없는 고집도 부리고 과한 자책도 하는,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나처럼 모자라고 부족하고 위선적인 사람이다.


대체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과 철저한 논리가 주가 된 냉철한 지식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한 치의 오차와 모순도 허용하지 않는 삶을 꿈꾸고, 그래서 자신의 삶 자체도 하나의 완벽한 원리로 관통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 세계에서든 자연과 우주 세계에서든, 하나의 완벽한 원리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부존재하는데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열심히 좇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몸 따로 머리 따로 노는 것은,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표현을 빌어오자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을 생각의 집합체로만 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사람들의 위선을 바라보면, 아예 이해를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상원이네 가는 길, 석양이 피어오르는 하늘에 떠 있는 반달. "사소한 감정따위는 개나 줘버려, 이성이 최고야!"라고 말하면서도 종종 괜한 시적 감수성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위선을 거부하겠다는 나의 원대한 꿈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타고난 팔자조차도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의 선조는 일백번 고쳐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고 외치다가 세상을 떴다. 그러나 당신의 후손인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정신으로 일백번 고쳐 죽어도 지조를 지키겠다는 사람이 못마땅해서 철퇴를 든 사람에게 더 공감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참 묘하다.


 


'2018 > 2018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춘기.  (0) 2018.04.22
위선에 대하여.  (0) 2018.03.26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0) 2018.02.25
위로 받고 싶을 때.  (0) 2018.02.23
반성.  (0) 2018.02.03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3.13 06:32


예전에 개인적으로 부동산 대책을 평가하면서 각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대출 한도를 부동산의 시장가치에 결부시키는 주택담보대출(LTV, Loan to Value) 제도를 비판한 적이 있다. 대출 여부와 이에 따른 책임은 궁극적으로 청년과 은행, 즉 시장의 몫인데, 이를 정부가 사전에 지나치게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LTV 제도는 적어도 가계부채 급등으로 인한 저소득층의 파산 위험을 낮추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정부에게 지나친 가계부채는 큰 부담이기 때문에 LTV 제도의 유효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 역시 지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바 있다. 이번 주 AEJ 논문도 이를 다루고 있다. 


저자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두고 있다.


The findings suggest that policies to curb excessive home equity extraction by capping LTV can, indeed, lower eventual default.


While mandatory caps on home equity borrowing helped Texas curb mortgage defaults, the limits also could hurt long-term economic growth by impeding consumer spending during a housing boom, preventing homeowners from optimally utilizing their home equity and tightening liquidity constraints.


간단해 보이는 정책마저도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명쾌한 답을 얻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 담당자는 어떠한 근거로 어떻게 확신을 갖고 무슨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정말 정책은 정치인의 몫인가 생각하게 된다.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8/2018_생활2018.03.13 03:23


인스타에 남겨둔 몇몇 일기를 옮겨 놓는다.



#2월 19일. 중독.


요새 중독된 것 2가지, 인스타에마저 뻘글 올리기, 그리고 테니스 치기. 하루가 멀다하고 찾는다.


테니스는 마약 같다. 긴장감을 갖고 경쟁적으로 공을 치고 싶을 때가 있다. 더 강한 사람, 새로운 사람을 찾게 된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외국 친구들과 종종 단식을 친다. 베이스 라이너라 복식보다는 단식을 훨씬 더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단식 칠 때 많이 냉정해지지만, 상대는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게임 잘 안 풀릴 때 라켓 바닥에 내리 꽂으며 스스로에게 욕하고, 좋은 샷을 날릴 때 "컴온"을 외치는, 이러한 것들이 정말 매력적으로 보인다.



#2월 23일. 정.


주는 정 때문에 마음고생을 꽤 많이 한다. 많은 정을 준 사람들과 떨어지면 가슴앓이를 심하게 한다. 공허해지는 마음을 잘 다독이지 못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스스로도 잘 안다. 그래서 사람한테 쉽게 정 주지 말고 물 흐르듯 살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아 자주 애를 먹는다.


달리 생각하면, 바로 그 주는 정 때문에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 밤은 괜히 마음을 줘버렸나 후회될 만큼 왠지 많이 허전하다.



#3월 2일. 싱숭생숭.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동경하는 선배들이 회사를 떠나 다른 길을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연차가 낮은 사무관급 선배의 이탈을 보면 더욱 그렇다. 왜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떠난 형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항상 차선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잘 덤비지만 누울 곳을 보아가며 덤비는 영악함이 있다고 해야 하나. 서울대 못 갔을 때, 행시 떨어졌을 때, 박사 못 받았을 때 등등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차선책이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고 준비했다. 이러한 자세가 삶을 안정감 있는 길로 인도해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만큼 최선에 대한 확신이 아무래도 덜해지는 측면이 있다. 눈은 최선을 향하고 있어도 몸이 차선을 준비하고 있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진정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잘 세워야 한다. 그리고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세우는 일은 정말 어렵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일 때도 이렇게 어려운데 가족이 생기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배부른 고민인가. 우리네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태바 녀석의 말이 생각나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3월 5일. 수필.


나는 어릴 때부터 조잘조잘 잘 떠들어댔다. 그 시절부터 머리가 굵은 말동무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이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든 어른들의 무거운 이야기든, 고마운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몰랐을 어린 내가 처음 접했을 새로운 단어들로 나와 조곤조곤 잘 떠들어주었다. 엄마라는 말도 못하는 아기들과 내가 옹알옹알 대화를 쉽게 나누는 것도 아마 나의 어린 시절 기억 탓이려니.


어릴 적부터 나름 고급 어휘를 구사하며 쫑알쫑알대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등학생 시절 치렀던 수많은 받아쓰기 시험에서 단 한 개만 틀려본 잘 나가는 꼬맹이였다.


아직도 틀린 문제가 생생히 기억난다. 초등학생 2학년 때, "꽃을 '밟'았습니다"라고 썼어야 했는데 "꽃을 '밝'았습니다"라고 써버리는 참혹한 실수를 저질렀다. 맨날 호빵만한 동그라미가 그려져있는 100점짜리 시험지만 받았었는데, 빨간 소나기 한 줄기가 내리고 있는 9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보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빠엄마 앞에서 정말 부모 잃은 아이처럼 울어제꼈다. 아직도 분하다. 그래서 꽃을 보면 가끔 즈려밟고 싶어진다.


우리말은 예쁜 구석이 참 많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는 예쁜 우리말도 정말 많다. 오랜만이어서 낯설지만 너무 반가운 나머지 계속 머릿 속을 맴도는 단어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아까 아침에 동생과 연락하면서 자기는 아직 상큼하다는 말을 했는데, "상큼하다"는 단어를 얼마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또 얼마 전에 소유욕이 생겨 손에 물건을 쥐어주면 놓지 않으려는 민형이에게 "우리 장난꾸러기 민형이가 심술쟁이도 되고 있네요~"라고 속삭였는데, "장난꾸러기"와 "심술쟁이"라는 단어를 몇 년만에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쁜 우리말을 많이 담고 있는 따뜻한 수필을 읽고 싶어서, 고 장영희 선생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글이 참 소박하고 담백하다. 책에 담긴 아름다운 글귀를 살짝 남긴다.


그러나 말하면 무엇하나, 어차피 삶은 한 번뿐이고, 연습은 없는 것을. 오늘도 나는 '삼치'에 '둔치'로 이리 헤매고 저리 넘어지지만, 내 인생에 오직 한 번 오는 2000년이라는 숫자는 너무 가슴 벅차고, 넘어지면서 보아도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여전히 아름답다.


언젠가 먼 훗날 나의 삶이 사그라질 때 짝사랑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면 미국 소설가 잭 런던과 같이 말하리라.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고. 그 말에는 무덤덤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3월 9일. 나이.


나는 어릴 때도 좋은 기억이 참 많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나이가 되어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나이 드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또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야만, 때로는 나이를 반대로 먹은 것처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고.


이미 겪은 나이보다는 앞으로 겪을 나이가 더 가슴 두근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게 화려해질 30대를 기대하면서.



#3월 10일. 차별.


어제 친구가 좋은 글을 공유해주길래 살짝 끄적여보았다. 기사를 쓴 천관율 기자도, 기사에 소개되는 최정규 교수님도, 원래 이쪽 세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분들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계급적 열등감을 크게 가지고 살았다. 실제 자라온 환경이 그랬다. 그래서 차별이라는 문제를 정말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엄하다. 차별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성, 인종, 국적, 외모, 재산, 소득, 교육 등 다름이 있는 모든 것에 차별은 존재한다. 자연의 힘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차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차별로 이끄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고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시도는 존중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도전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한계인 위선이라는 가벼운 장벽조차도 쉽게 넘지 못한다.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하면 경세가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성인군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되지 못할 그릇이라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나쁜 놈과 위선자, 둘 중에 전자의 길을 택했다.


나처럼 현실적이고 보수적이고 솔직한 길을 택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남자인 척하는 여자, 백인인 척하는 흑인, 미국인인 척하는 한국인, 모두 내면의 갈등 끝에 내린 차선의 길이라고 본다. 차별 속에서 어떻게든 성공하기 위해 내린 이들의 선택이 아니꼽다고 비아냥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계급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차별의 아픔, 나는 이에 대한 자기방어기제로 다양한 정체성을 키우는 길을 택했다. 이쪽에서의 열위를 저쪽에서의 우위로 상쇄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갖추는 것이 내가 도출한 해법이었다. 때로는 남자로서, 때로는 직장인으로서, 이런 식으로 각각의 상황에 최선이 되는 정체성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다행히도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몸소 터득했다. 계급, 성, 인종, 국적 등등은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일 뿐, 언제 어디에서나 절대적으로 우선시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수많은 영역에 발을 두고 있다면, 단 하나의 정체성만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어느 하나를 택하면 어느 하나는 포기할 수 있다는 유연함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단적인 사람들과 잘 맞지 않는다. 모든 논리가 하느님의 뜻으로 통하는 극성 종교인들과 나는 전혀 통할 수 없고, 모든 논리가 여성 차별로 비화되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과 나는 전혀 통할 수 없다.


차별에 관한 위와 같은 이해는 정말 오랫동안 쌓아온 나만의 개똥철학이다. 요새 화두인 남녀차별 역시 이 맥락에서 본다.


남자와 여자는 많은 지점에서 다르고, 이 다름에서 유발되는 차별이라는 현상 자체는 불가피하다. 만약 페미니즘의 본질이 남녀차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크게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이라면 나는 당연히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근본 목표가 남녀차별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적인 가치인 자유를 인간적인 가치인 평등보다 높게 친다. 사람은 자유, 경쟁, 차별을 통해 성장할 때가 많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급적 통제하려고 하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마따나 따뜻한 개천은 없다. 내가 개천에서 왔기 때문에. 따뜻하면 당신들이 개천으로 가라.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차별을 부정하는 위선자가 되느니 차별을 용인하는 나쁜 놈이 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러한 내가 싫다면 나를 거르라는 의미에서 미리 커밍아웃을 한다. 내 스스로 펜스룰을 적용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상대가 펜스룰을 적용하겠다면 진심으로 당해줄 의향이 있다. 기꺼이 걸러짐을 당하겠다.



#3월 12일. 자랑.


자랑 하나 남긴다. 위스콘신대-아이오와대-아이오와주립대 3개 대학 한인 테니스 대회에서 남자복식 우승했다. 박사 받으러 왔는지 테니스 치러 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승했다.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가슴2018.02.25 07:28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은 많은 경우에 비대칭적이고,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당장 내가 다른 사람한테 대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도 아닌 사람에게는 벽을 치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나와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여지라도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겠지만, 그마저도 보이지 않으면 혼자서만 부던히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정말 자기 혼자만 그러고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만 달아오르는 감정은 빨리 가라앉히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려야 맞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나로서는 쉽게 그럴 수가 없다. 차라리 긴 호흡으로 지금 당장은 참는 편이 내가 택해야 하는 길 같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을 하면서.


오늘의 조급함으로 내일의 기회까지 놓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이므로 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힘들게 이끌어가야 하는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연극은 끝나기 마련이다.


인연은 어느 한 사람이 억지를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호흡을 같이 가져갈 수 있어야 인연이다. 될 인연이라면 조심스러우면서 서툴기까지 한 내 눈에마저도 틈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나도 기어이 움직일 것이고. 끝까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차피 안 될 인연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슴앓이를 얼마나 어떻게 하든, 이 부분에 있어 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18.03.03. 추가.


"혼자가 더 편한 사람들의 사랑법: 연애불능 세대, 사랑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것들" 중에서 발췌했다.


에리히 프롬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 자신, 자신의 장점,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을 분명히 알고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자아도취 사회에 살고 있다. 자아도취는 불안의 신호이며, 어떤 약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높은 자아상이고, 자신의 장점만을 지속적으로 증명하는 데 의존하는 자화상이다. 자아도취적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내게 항상 호의적인 거울을 바라는 것과 같다. 그 친절한 거울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언제나 만족스럽게 비춰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증명하려고만 한다. 타인에게 상을 투사하고, 결국 자신에게 완벽하게 들어맞게 하는 환상, 하지만 정작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환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자아상과 사랑에 빠지려고 한다.


오늘날 숱하게 거론되는 연애불능과 애착불능은 자기실현과 완벽을 향한 노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나하고 더 잘 맞는 상대, 내 삶을 더욱 유의미하게 채워줄 상대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기면 이런 생각을 더 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실현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 방향을 바꾸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각하고 이러저리 저울질하고는 뒤로 미루어버린다. 그리고 항상 변명거리를 찾는다. "지금은 아니야"라는 말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타이밍을 찾을 때까지 계속 기다리기만 한다. 이사할 타이밍, 일을 그만둘 타이밍, 헤어질 타이밍, 자녀를 가질 타이밍. 안정적인 것에 대한 생각, 이것은 우리를 속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앗아간다.


물론 연애할 때 나이 차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나이를 통해, 그리고 나이와 결부된 경험을 통해 제한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연애관계에서 공통된 주제, 공통된 인생설계, 공통된 목표는 중요하다. 이것은 연애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지금 이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해진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요즘, 우리는 사랑마저도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만큼 연애에 대해 더 까다로운 요구사항과 더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바로 '상대를 향한 헌신과 노력'. 저자는 완벽은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이며, 완벽한 사랑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뭔가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사랑은 그러한 구조를 탈피하고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자극'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누구에게나 썸머도 있고 어텀도 있다. 모두 삶의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좋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2018 > 2018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춘기.  (0) 2018.04.22
위선에 대하여.  (0) 2018.03.26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0) 2018.02.25
위로 받고 싶을 때.  (0) 2018.02.23
반성.  (0) 2018.02.03
Posted by 고숑
2018/2018_가슴2018.02.23 03:28


전체적으로 무난히 살고 있지만, 그래도 방황을 상당히 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마음을 다잡는 겸 선배들의 발자취를 훑어볼 때가 많다. 내가 많이 동경하는 당신들께서도 나와 비슷한 시절에는 같은 고민을 하셨을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운좋게 희망한 것들을 빨리 이루고 이것이 쌓이다 보면, 소위 말해 "빨리 사는 사람"이 된다. 나는 대표적으로 그러한 유형의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조급증을 안고 산다. 허비되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나는 낭비하는 시간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고,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큰 자신감이면서 동시에 열등감이다. 빠른 만큼 덜 여물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리로 빛나는 사람이 아닌 자리를 빛내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는 반대의 길에 더 깊이 빠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내 자신에게 자주 던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몇 년의 차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빨리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체감한다. 빨리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적당한 시기에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임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에 계속 달릴 수도 있고, 이것의 부질 없음을 깨닫고 내려놓을 수도 있다. 막연하게나마 그 중간 쯤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다짐한다. 계속 달리되 내려놓는 사람의 여유를 지닐 것. 욕심은 부리되 미련은 버릴 것.


긴 시계열에서 몸과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려고 애쓰고 또 애쓴다. 억지 부리지 않고 중력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2018 > 2018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춘기.  (0) 2018.04.22
위선에 대하여.  (0) 2018.03.26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0) 2018.02.25
위로 받고 싶을 때.  (0) 2018.02.23
반성.  (0) 2018.02.03
Posted by 고숑
2018/2018_생활2018.02.11 05:01


아까 엄마와 여기에서 친구네 아기를 안아주고 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아진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기를 좋아하고 잘 챙겼는데, 유독 동생한테만큼은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동생을 잘 돌보는 척하다가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렇게 동생을 때려서 울렸다고. 엄마가 울고 있는 동생을 달래러 오면 나도 같이 울어서 안아달라고 했다고. 그래서 나는 동생도 때리고 혼나지도 않고 맨날 안겨 있었다고. 어릴 때부터 영악함이 묻어났던 모양이다.


나는 우량아로 태어났다. 4kg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갓 태어난 아기가 한 3개월은 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확실히 아기는 포동포동해야 안아주기도 쉽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어제 내 품에 안겨 있던 아기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신생아의 몸무게가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Sandra Black의 유명한 논문을 드디어 읽어본다.



이번 학기에는 Econ 102 수업 TA를 맡았다. 학생 중 한 명이 학교 테니스 선수이다. 이번 주 여기 위스콘신 대학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대학 여자테니스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그런데 시합이 있던 어젯밤에 메일을 보내왔다. 테니스 시합 때문에 수업에 못 갔는데 수업자료를 메일로 보내주면 혼자 공부하겠으며, 내가 테니스 팬이니까 시간이 나면 시합 구경을 오라는 내용이었다. 성적 최저 기준을 맞춰야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신분일 것 같지만, 어쨌거나 힘든 운동을 하면서도 학생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니 멋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원래도 그렇지만, 요새 유독 주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2.09 07:55


개강 이후 내 연구는 뒷전이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많이 찾아 읽는다. 연구실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 및 여성 관련 논문과 데이터를 보는데 쓴다. 나는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는 하지만, 엄마 덕분에 가정과 회사를 잇는 젠더 감수성만큼은 없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자꾸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여성가족패널과 여성관리자패널 데이터를 살짝 살펴보고 있는데 구체적인 논문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커리어에도 욕심이 있고 가정도 꾸리고 싶은 여성에게 회사, 특히 사기업은 쉽지 않다. 워킹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 해결책을 탐색하는데 내 공부 시간의 상당 부분이 할애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여성 친화적인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선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정, 특히 남편이 중요하다. (그래도 국책연구소에서 여러 정책적 대책을 담은 연구보고서를 내고 있다.)


그렇지만 어려우니까 더 도전해볼 만한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하나씩 이겨내는 모습이 나한테는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좋아하고 잘 따랐던 상사들이 그랬다. 현 대위님과 장 팀장님,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정말 초인적인 분들이었다. 그 모습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적폐로 여겨지는 한국스러운 문화에 스스로를 집어 넣기도 했다. "과장님 바쁘시죠, 저 지금 한가한데 제가 유치원에서 아이 데리고 올까요?"라고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분야 논문도 훑어본다. 여기서 알게 된 미디어를 전공하는 누나가 잡마켓을 나간다고 하기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논문을 하나 읽었는데 내용이 흥미로웠다. "나르시시스트"의 개념이 내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기도 했거니와, 이들의 페이스북 사용 패턴을 분석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링크)


대체로 무난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허전함이 가시지 않는다. 원래 사람은 고독한 존재라고 하는데, 그래서 외로움을 사람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말처럼 마음을 다독이기가 쉽지 않다. 허한 마음은 운동으로 잊으려고 한다.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8/2018_가슴2018.02.03 06:23

얼마 전 나의 부주의로 태훈 형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주변 분들이 연구하고 논문 쓰고 하는 것을 존중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연구에 있어서는 스스로 가볍게 군다. 가령 저널에 논문 출판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내 논문에 미련이 없으니까 "대충 서밋해보고 통과하면 땡큐, 리젝 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내 논문을 다룬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생각을 주변에 가감 없이 편하게 말하는 편인데, 이것이 때때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는 한다. 이쪽으로는 내가 배려가 부족하다.

쓴소리 해주는 사람을 곁에 두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러나 결국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다. 고장이 났다면 고쳐서 더 단단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라고 믿는다.

형, 미안합니다.



장교 시절로 기억한다. 수년 전 "뉴스룸"이라는 미국드라마에서 Coldplay의 "Fix you"를 처음 들었다. 점점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드는 전개가 정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얼마 전 Kodaline의 "All I want"를 듣는데 느낌이 "Fix you"와 많이 흡사했다. "In a perfect world" 앨범의 모든 수록곡이 참 좋다.


'2018 > 2018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춘기.  (0) 2018.04.22
위선에 대하여.  (0) 2018.03.26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0) 2018.02.25
위로 받고 싶을 때.  (0) 2018.02.23
반성.  (0) 2018.02.03
Posted by 고숑
2018/2018_생활2018.01.24 02:13


요새 호주오픈에서 정현이 맹활약하고 있다. 테니스의 인기가 한층 높아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다. 착각이기는 하지만, 나만 알고 좋아했던 것이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도 알고 좋아하는 것이 되었을 때 느끼는 묘한 상실감이 있다. "너는 오직 나만 사랑해야 하고, 나 역시 너만 사랑할 거야." 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침입자가 등장한 느낌. 그래서인지 전에 없던 질투와 소유욕이 생긴다.


겨울방학 동안 사진 올리는 재미에 인스타에 일기를 썼다. 내 페북이나 인스타는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결국 이 공간이 오래 갈 것이다. 기록하고 싶은 지난 한 달 가량의 일기를 옮겨 온다.



#1월 13일. 도서관 앞을 지나니까.


춥고 적막한 밤에 도서관 앞을 지나니까, 병든 마음을 이끌고 묵묵히 공부했던 1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매일 같이 공부했던 로스쿨 도서관, 매일 같이 남몰래 펑펑 울며 지냈던 그 곳.


종종 마음에 병이 들 때가 있다. 대체로 자신만만하게 사는 나도, 누구나처럼 병든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는 한다. 병든 마음 앞에서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많이 흔들린다.


마음에 병이 있을 때는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그렇게 왜곡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괜찮아, 힘내!"라는 위로조차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로 받아치게 되는,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니까.


혼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참 어렵다. 매일 같이 병든 마음을 안고 살지는 않지만, 잊었다 싶으면 찾아오는 불청객이기 때문에, 혼자 마음을 잘 다독이는 것은 많이 어렵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아빠와 엄마, 무심한듯 위로해주는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도 마음의 병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요새도 종종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한국은 연락하기 편한 시간이라 다행이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병든 마음을 보듬어주는 가장 큰 힘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그냥 마음만으로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1월 14일. 아쉬움.


가볍게 했던 언행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곡해되니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솔직히 내 탓이다. 이 나이에 이르러 방정 맞게 굴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내가 처신을 잘못한 것은, 솔직히 맞다.


오직 테니스에만 집중할까 싶다. 이미 돈은 관리하기로 했으니 그것만은 챙기되, 앞으로는 나도 테니스 잘 치는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잘못된 의협심으로 혼자 망가지려 하지 말고, 뒷풀이 같은 것에 가지 않으면 되고.


물론, 오늘 하룻밤 자고 나면 지금의 삐딱한 생각이 바로 달라질 나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지만, 그만큼 바보처럼 사람을 믿고 좋아하지만, 그만큼 혼자 마음을 잘 추스려내지만, 그래도 때로는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술을 마시며 혼자 삭이기도 한다는 것을.


무엇이든 예쁘게 포장할 만큼 세련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진심을 숨기는 적은 없는데. 내 일기장 이름이 Candid인데.



#1월 21일. 내 사람.


내 마음을 내어주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내 사람이 생긴다. 나에게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소수의 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내 심장을 먼저 내어준다. 사람 마음을 얻으려면, 종종 상처는 받더라도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다.


여러 사람들이 그 사람 조심해야 한다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잠깐 스치는 인연으로 남는다. 그러나 몇몇은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그렇게 더 깊고 오래 가는 내 사람이 된다.


내 사람은 친밀함, 가까움 등의 개념과는 다르다. 마음을 열지 않아도, 내 사람이 아니어도, 서로 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친한 사람은 그때마다 다르지만, 내 사람은 한결 같다.


내 사람은 내가 챙긴다. 내 사람에게는 굳이 받지 않는다. 주는 것만으로도 좋기 때문에. 지킬 것도 끝까지 지켜준다. 내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1월 22일. 스스로의 힘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사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잘 산다. 그런데 돈이 있으면 또 있는 대로 펑펑 쓰면서 잘 살 것 같다.


누구나처럼 돈이 많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다. 그런데 나를 위한 소비에는 관심이 적다. 명품, 이런 거 잘 모른다. 씀씀이에 대한 희망은 조금 소박해서, 술자리에서 술값을 내가 낼 정도만 되면 만족할 것 같다. 기분 좋으려고 돈 쓰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이라면, 난 기본에 충실하다.


친구들끼리 연봉을 비교하며 이 직업 저 직업이 좋다고 푸념하지만, 현재의 높은 연봉이 미래의 안정성 등과 대체되면 큰 장점인지도 모르겠다. 월급쟁이는 결국 고만고만해 보인다. 상속과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압도하는 세상이다. 투자 센스나 사업 수완이 없다면, 평범한 월급쟁이가 강남에 아파트 떡 하니 사주는 부모 둔 사람을 넘기 쉽지 않다.


태어난 팔자가 애초에 받을 것이 없고.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기에 탓하고 싶지 않고. 쪽팔리게 누구 덕을 기대하며 살고 싶지 않고. 어린 시절 바닥부터 치고 올라왔으니 나이 들수록 말도 안되게 화려해질 일만 남았고. 설령 화려해지지 않더라도 소소하게 사는 것 역시 내 미니멀 라이프 성향을 보면 괜찮을 것 같고. 내 가족 정도는 내 힘으로 먹여살린다는 작은 배짱은 지녀야 하는 것 같고.


확실히 혼자 힘으로 점점 있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내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는 사소하더라도 큰 기쁨을 준다. 그게 나한테 맞는 삶의 방식이고.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1.16 06:12


실증 분석의 묘미는, 유의미한 결과가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당연한 가설에 뻔한 결론을 내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계량 분석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 때가 자주 나타난다. 이번 겨울방학 동안 새로운 데이터를 얻어 오랜 시간을 쏟아 정리한 후, 현재 여러 각도에서 분석을 시도해보고 있지만, 좋은 결과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본업이 연구여서 저널에 출판을 해야 하는 연구자에게는 매우 슬픈 일이다. 버리는 논문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본업이 연구가 아닌 나로서는 아쉬운 결과에도 비교적 담담한 편이다. 다만 약간의 강박증이랄까, 결론이 있든 없든 어쨌거나 한 번 작한 글은 마침표가 있는 하나의 완성된 글로 만들고 싶어다.


가끔 챙겨 보는 "저글러스" 중에는 아래와 같은 대사가 있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똑같을 수 없잖아요. 누구는 더 크고 누구는 더 작죠. 큰 사람은 점점 더 억울해지고 마음이 더 작은 사람은 미안해지고. 그렇게 큰 사람은 지쳐가고 작은 사람은 죄책감이 들죠. 뭐, 그러다 보면 헤어지게 되요."


지금으로서는 논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마음을 많이 썼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한 만큼 미안한 만큼 결국에는 이 논문과 헤어져야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서론, 본론, 결론의 옷만큼은 다 갖추어주고 싶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은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니까. 그리고, 왠지 그래야만 다음에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8/2018_생활2018.01.07 03:37


요새 외로움을 부쩍 많이 탄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겸, 해질 무렵 꽁꽁 얼어붙은 멘도타 호수 위를 혼자 걸었다. 영하 20도에 호숫가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니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무척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가슴 한 켠이 공허해질 때 종종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부부 집에 놀러가서 모처럼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4개월 정도 된 아기도 많이 안아줬다. 순하디 순한 아기였다. 내 품에도 잘 안겨서 생글생글 웃고 옹알옹알 대는 것이 정말 무척 예뻤다. 심장이 아프다는 말을 알겠다.



언론을 공부하는 친구들이라 SNS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SNS를 하는 사람이 확실히 늘고 있지만, 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가 확연히 구분되면서 사용 패턴에 양극화가 발생한다는 느낌이 있다.


나의 불만은, 콘텐츠를 소비만 하는 소위 "눈팅족"들이 정작 자신들의 유희 등을 충족시켜주는 콘텐츠 생산자를 은연 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걔는 쓸데 없이 그런 글과 사진을 왜 올렸대?" 


자기 스스로 이 쓸데 없는 글을 읽지 않고 사진을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쓸데 없는 콘텐츠를 소비한 사람은 인간적인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콘텐츠를 클릭해버린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자신을 먼저 탓하기보다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보는 경우가 많다. 내가 SNS의 적극적 소비자이자 동시에 능동적 생산자에 속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중적인 태도에는 아쉬움이 많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하지만, SNS는 종종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AEJ: Applied Economics" 저널에 굉장히 흥미로운 논문이 하나 실렸다. 동 논문은, 러시아 국영기업들의 부패를 고발한 Alexey Navalny의 블로그가 해당 기업들의 주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기업들의 운영 행태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종종 예전에 쓴 글들을 천천히 읽어 본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 애인과 친구 등 사람들과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적어두었던 구절을 발견했다. 변할 수 있는 부분은 잘 변하는 것 같지만, 사람의 근본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품었던 아래의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의 근본이라고 해야 할까.


진심을 전하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

나는 나를 많이 사랑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내 스스로 다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방법이 최선이다.

조용히 과녁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래 쥐고 있던 활시위에서, 정말 어렵게, 감정의 화살을 떠나 보낸다.

이 화살이 상대의 과녁에 명중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의 통제를 넘어선 부분이다. 나는, 이것은 화살이 아니라 과녁이 판단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나의 자존감을 결부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활시위를 떠나 보낸 화살에는 미련을 갖지 않는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마음을 추스리고 다음 화살을 준비한다.


'2018 > 2018_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영과 정대현.  (0) 2018.04.24
특이한 향수.  (0) 2018.04.01
일상 기록.  (0) 2018.03.13
사람.  (2) 2018.02.11
일기 이동.  (4) 2018.01.24
블로그의 힘.  (2) 2018.01.07
Posted by 고숑
2018/2018_머리2018.01.03 08:29


나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이 확실하지만, 연구가 잘 안 풀린다 싶을 때 기분이 살짝 더 가라앉는 것을 보면, 그래도 나한테 연구 유전자가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연구가 잘 풀린다 싶을 때 기분이 살짝 더 올라오면 좋을 텐데, 이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는 과학에 속한다."는 신념이 나를 유학길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나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직장인이고, 과학, 특히 경제학은 이 문제에 정답을 내리고자 한다. 사회 문제에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직장인이라니, 얼마나 황홀하고 멋진 일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할 때까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승진할 때까지, 국비유학 기회를 얻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하염없이 미루다 보면 유학의 이유가 본래의 목적 이외의 것으로 변질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인 내가, 이 문제만큼은 머리로 명민하게 판단하고 몸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직장 경력에 있어 생길 수 있는 손해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국에 와서 공부한지 2년 반이 흘러간다. 반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나를 유학길로 이끈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는 과학에 속한다."는 신념은, 현재의 공부와 연구로는 해소되기 어렵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사실 이 결론을 내린지는 조금 시간이 되었다. 지금의 공부와 연구가 사회 현상을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사회 문제에 대한 정답을 주지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왜 그렇게까지 이 일을 하려고 하니?" "큰 실익도 없어 보이는데 왜 공부를 더 하려고 하니?"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고 지금도 많이 받는다. 웃어 넘기는 차원에서는 출세, 명예, 영향력, 안정성 등 여러 세속적인 이유를 들 수도 있겠다.


다만 정말 진지하게 답을 할 필요가 생길 때면, 나는 아래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여러 사회 현상에 있어 나만의 확실한 판단을 하고 싶고, 이러한 내 판단이 정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나는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 세상에 직접 실현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잘 모르는 뿌듯함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공부는 나의 이러한 소망들을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이처럼 세속적 동기 이외의 것이 상당히 강하게 내재된 편이기 때문에,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가 쉽지는 않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요새는 내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지고는 한다. 안타깝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의 위 세 가지 소망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에서 나도 옳은 것 같고 너도 옳은 것 같기 때문에 내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설령 확실한 판단을 하더라도 이것이 정답인지는 스스로도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정말 운좋게 내 손에 정답이 있더라도 이것을 사회에 실현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좌절 속에서, 사회 문제에 정답을 도출하여 사회에 구현하고 싶다는 나의 갈증이, 나도 모르는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해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구체적으로 형용하기가 어렵지만 왠지 그러한 느낌이 있다. 또한 나는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삶은 "세렌디피티"인 것 같기도 하다.


'2018 > 2018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상자.  (0) 2018.04.18
서로의 룰이 있다.  (0) 2018.04.14
고민 끝에 답은 여전히 없다.  (0) 2018.03.13
다른 사람 연구 엿보기.  (0) 2018.02.09
끝맺음.  (0) 2018.01.16
반환점에 서서.  (0) 2018.01.03
Posted by 고숑
2017/2017_머리2017.12.31 06:43


읽고 싶었던 책인 Jonathan Haidt의 "바른 마음"을 태바에게 받아서 읽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들을 옮겨둔다.


69

도덕성의 범위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가 몹시 좁다. 반면 사회중심적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를 넓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써 삶의 더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고 통제한다. (...) 사람들이 갖는 직감은 때로 도덕적 추론을 진행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덕적 추론은 때로 사후 조작과 다름없는 양상을 보인다.


109-110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기수는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다. (...)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누구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자신의 직관에 어긋나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하면, 그들은 전력을 다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144-146

도덕심리학을 구성하는 첫 번째 원리는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라는 것이다. (...) 도덕심리학에서 말하는 행위 대부분은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에게서 일어난다. (...) 그렇다면 우리가 이토록 괴상한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 그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적응하는 데에는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누가 어떤 행동을 왜 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밝히는 것보다는 뇌의 힘을 모조리 동원해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일이 더 중요했다는 뜻은 아닐까?


182

마지막으로 결론부에서 나는 (때때로 철학계와 과학계에서 나타나는) 이성에 대한 신봉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이성을 신봉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 그보다 나는 도덕성과 도덕교육의 문제를 직관주의자의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틀에서는 개개인의 능력을 좀 더 겸허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214-215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서양적이고 고학력이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주의적인(=WEIRD로 칭한다)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관계보다는 별개의 사물로 가측 차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 도덕의 범위는 WEIRD권 문화에서는 좁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는 도덕의 범위가 대체로 자율성의 윤리에 국한된다. 그러나 그 밖의 대부분의 사회를 비롯하여 WEIRD권 사회 내에서도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는, 도덕의 범위가 더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241-242

도덕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각과 비슷하다. 도덕에 대한 흄의 접근법은 다원주의적이고 감성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현대 도덕심리학에는 공리주의나 의무론보다 이런 접근법이 더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흄의 구상을 복원하려는 첫걸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른 마음이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미각 수용체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바른 마음의 미각 수용체가 될 좋은 후보로는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다섯 가지가 있다.


285-286

배려/피해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무력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 공평성/부정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협동으로 보상을 얻되 착취는 당하지 말아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 충성심/배신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연합을 구성하고 유지해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 권위/전복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사회적 위계 서열 내에서 인간관계를 잘 구축하여 모종의 이득을 거두어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 고귀함/추함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애초에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으나, 병원체와 기생충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더 광범한 도전 과제 역시 후일 이 기반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좌파는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 주로 기대는 반면, 우파는 다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좌파의 도덕성은 고작 한두 개의 미각 수용체를 활성화시키는 반면, 우파의 도덕성은 충성심, 권위, 고귀함까지 아우르며 더 폭넓게 미각 체게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유권자들과 연결될 더 폭넓고 다양한 방법도 결국 보수적 정치인들이 손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335-335

진보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기반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단 진보주의자들은 공평성이 동정심이나 압제에 대한 저항과 상충할 때에는 공평성은 버리고 그 대신 이 둘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주의자의 도덕성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보주수의자는 진보주의자에 비해서 배려 기반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른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2017 > 2017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바가 보내준 책 요약.  (0) 2017.12.31
비주류 출신으로서.  (0) 2017.12.27
황의 기획 기사를 보며.  (0) 2017.12.05
알다가도 모를 인과관계.  (0) 2017.11.28
현재 가장 큰 고민.  (0) 2017.11.21
늘공과 어공.  (1) 2017.11.02
Posted by 고숑
2017/2017_머리2017.12.27 06:17


오랜만에 "Journal of Public Economics" 저널에 "백인인 척하는 흑인(acting white)" 문제를 다룬 논문이 출판되었다. 내 평생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링크)


논문은 그간 축적되어 온 논의를 조금 더 보강한다. 주류 집단은 학벌 등의 스크리닝을 통해 오직 능력이 출중한 비주류만 주류 집단으로 편입시키려고 한다. 일종의 "체리 피킹(cherry-pick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맞서 비주류 집단은 능력이 출중한 동료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배신자라는 낙인을 강화시킴으로써 집단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주류와 비주류가 뒤섞인 환경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능력 중심의 소수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은 비주류 집단의 이원화를 심화시킨다. 쉬운 예로 "가난한 시골 학생"이라는 비주류 집단을 들 수 있다. 이 비주류 집단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주류 집단을 동경한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도시로 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지역 할당제 등과 같은 정책은 이들 중 능력이 닿고 노력을 쏟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그 결과 출발선은 서로 비슷했던 가난한 시골 학생들의 삶은 시간이 흐르면서 매우 달라진다.


논문의 저자는 위와 같은 비주류 집단의 이원화와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막기 위해 성공의 보상이 개인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비주류 집단 전체에게 귀속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경우, 아이디어는 이해되는데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어서 크게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리나라 맥락에서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 중 하나는 바로 공부였다. 그래도 공부는 공정한 경쟁이라고 여겨졌고, 이 공부가 파생하는 학벌과 직업이 비주류 집단의 한 사람이 주류 집단으로 편입될 수 있는 정당한 탈출구로 인식되었다.


최근에 이 통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공부에서 학벌, 공부에서 직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공정한지에 대한 문제 인식이 있다. 공부(능력과 노력)와 상관 없이 학벌과 직업의 세대 간 세습이 수월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내 스스로를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주변인이자 경계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비주류가 주류로 편입될 수 있는 공정한 경쟁과 기회에 대한 집착이 크다. 물론 이것이 꼭 공부일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하나 신청했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날씨는 많이 춥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한 겨울방학이었으면 한다. 적당히 할 일도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소소하고 잔잔하게 잘 보내려고 한다. 올 한 해도 잘 마무리하고 있다.


'2017 > 2017_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바가 보내준 책 요약.  (0) 2017.12.31
비주류 출신으로서.  (0) 2017.12.27
황의 기획 기사를 보며.  (0) 2017.12.05
알다가도 모를 인과관계.  (0) 2017.11.28
현재 가장 큰 고민.  (0) 2017.11.21
늘공과 어공.  (1) 2017.11.02
Posted by 고숑
2017/2017_가슴2017.12.24 12:43


엄마가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사진 몇 장을 보냈다. 사진을 보니까 대여섯살 남짓했던 어린 시절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에버랜드가 자연농원이던 시절에 놀러갔던 기억, 문이 2개 달렸던 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동해에 놀러갔던 기억, 한성아파트 근처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 엄마 혼자의 벌이로 버티면서 조금은 부족하게 살았지만, 엄마아빠의 사랑만큼은 넘치게 받았다. 당신들은 세상물정에 그리 밝지는 못했지만, 매우 현명한 부모였다.


이제 내가 당시 엄마아빠의 나이가 되어가면서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내 성향과 여건을 고려하면 바쁜 맞벌이가 불가피해 보인다. 나와 아내 모두 밖에서 바쁘게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엄마아빠가 육아를 도와주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 중 하나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엄마아빠에게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오라고 권유한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사진들을 보니까, 엄마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좋은 기억들을, 내가 아이와 쌓을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을, 왠지 당신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살짝 질투가 난다. 엄마아빠와 비교하여 세상물정에는 조금 더 밝아졌지만 아이에게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엄마아빠와 비교하여 벌이는 조금 더 나아졌지만 그만큼 아이와 함께 쌓을 수 있는 추억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질투가 난다.


육아의 부담은 엄마아빠에게 지우려고 하면서 육아의 추억은 내가 갖고 싶은 모양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역시나 이기적이다. 효자와 거리가 멀다.


  



------


18.01.30. 추가.


고정효과 모형 및 도구변수 분석법을 이용하여 조부모의 육아가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추정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곳 위스콘신을 졸업한 사람으로 나의 지도교수님 중 한 명인 Matthew 교수님과도 같이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육아와 관련하여 상당히 많은 연구를 쌓아온 것 같다.


조부모의 손을 탄 생후 18개월 정도 아이의 언어 능력은 향상되고 이 효과는 고소득층 가정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말이 많은 아빠를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다. 또한 조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의 기타 인지 능력은 저하되고 이 효과는 저소득층 가정일수록 두드러진다. 체계적인 교육법을 모르는 아빠를 생각하면 이 역시 놀랄 일은 아니다.


아기가 아빠를 닮으면 아빠가 아기를 더 보살피게 된다는 내용까지도 논문으로 나오고 있다. (링크) 진화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흥미롭기는 하다.


------


18.04.04. 추가.


위에 소개한 논문과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조부모의 육아가 조부모 자신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추정한 서강대 안태현 교수님의 논문이다. 아이를 돌보면 조부모의 인지 능력이 향상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적어도 육아를 조부모에게 떠넘길 수 있는 근거는 되겠다.


'2017 > 2017_가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를 향한 질투.  (2) 2017.12.24
도구는 되어도 호구는 안 된다.  (2) 2017.12.12
어마어마한 일이라.  (2) 2017.11.30
회상.  (4) 2017.11.13
나에게 연구는 감기 같은 것.  (2) 2017.11.06
가을이다.  (0) 2017.10.10
Posted by 고숑

티스토리 툴바